그런데, 국동반도의 북쪽의 지근에는 우사신궁이 진좌한다.
우사신궁은 일본 전국에 4 만여사 있다는 하치만신의 총본궁이다.
571 년, 우사의 땅에 하치만신이 시현한 것으로 알려져 725 년에, 신궁의 사전이 창건되어, 응신 천황이 제신으로서 모셔지고 있다.
아마 역사적으로는 오이타발에서 전국적으로 제일의 영향력을 가진 것은 우사신궁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치만신이란, 고대, 도래인의 농업신으로서 모셔진 것이 시작이며, 그 후, 하치만궁의 장원의 진수로서 모셔진 것 같다.
우사신궁과 천황가, 조정과의 접점은, 720 년, 하치만신이 미나미큐슈의 하야토의 난진압으로 수호신이 된 것, 또, 745 년, 나라 도다이지의 대불건립을 원조한 것이 시작으로 여겨지게 된다.
우사신궁의 특색은 무엇보다 조정에 신탁을 고하겠다는 점에 있었다. 그렇다. 그 횟수는 가마쿠라 시대의 말기까지 이어져 2백 수십 번에 달했다고 한다.
우사신궁과 조정과의 역사상 큰 사건으로는, 칙사의 화기 기요마로가 우사하치만의 신탁을 고하고, 천황의 지위를 물어보려는 승려, 도경의 야망을 봉한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우사신궁은 천황가의 수호를 위해 이시시미즈 하치만구의 창건( 859 년)을 탁선하고 있다. 1063 년) 되었다. 그리고, 가마쿠라 시대에 하치만신은 무사가 지두가 된 각지의 장원에서 모셔져 전국에 퍼진 것 같다.
우사하치만 신이, 고대부터, 궁정, 무가에 대해서도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왜 우사신궁은 그만큼의 힘을 갖고 있었을까, 앞서 꼽은 신탁에 그 비밀이 있는 것 같다.
또한 하치만구는 한때 규슈 장원의 3분의 1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져 경제적 기반이 있었던 것도 그 이유에 들 수 있다.
덧붙여서, 소설가의 사마 요타로는, 궁정에 신탁을 고한 것은 무녀이고, 아마 정치적 능력도 있어, 미인이었음에 틀림없다고 추찰하고 있다.
덧붙여 우사하치만은, 옛날, 하치만대보살이라고도 불리고 있어, 신불습합을 취지로 하고 있다.